중국 고대 일상사-예기(기녀)를 둘러싼 싸움
장안의 유흥가는 사람의 왕래가 많은 대로가 아니라 대로에서 벗어난 좁은 골목을 따라 발달했다. 그래서 유흥가를 협사라고도 부른다. 협사는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을 의미하는 말이다. 유흥가의 기원은 전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국가가 공인한 유흥가를 가리키는 말인 여려나 부려를 문헌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귀를 기울이면 왁자지껄한 남녀의 말소리도 들리고 예기들이 움직일 때마다 팔찌와 패옥이 짤랑짤랑 부딪치는 소리도 들린다.
예기의 역사는 오래되었고, 술자리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여성과 몸을 파는 여성을 아주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춘추시대 말기에는 군대 내부에 위안 시설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매춘 시설의 기원이 아닐까 한다. 또 한나라 때는 병사의 아내가 몰래 전쟁터로 따라 가기도 했다. 아내라고 말은 하지만 정황상 이들은 호적에 등록된 정식 부인이 아니라 내연관계에 있는 여성이거나 매춘부였다.
술자리에서 시중을 드는 예기는 흔히 비천하다고 하지만 아름다운 예기는 항상 인기가 많았으며 진나라 때의 녹주처럼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예기도 있다. 일설에 의하면 녹주는 갑부엿던 석숭이 과거 하노이 부근으로 출장을 갔을 때 그 미모에 대한 명성을 듣고 사들인 기녀라고 한다. 그렇다면 녹주는 동남아계 미인일 수도 있다. 또 후한 시대에는 황족인 유강이 음악을 잘하는 기녀 송윤을 사랑했고, 나중에 황족인 유착도 그녀에게 빠졌다고 한다. 이런 예기 쟁탈전은 한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실제로 전한의 애제는 쓸데없이 예기를 둘러싼 다툼이나 일삼는 가신들의 모습을 보며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예기의 삶이 반드시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개중에는 부자에게 의탁해 기생의 신분에서는 벗어났지만 그 후에 울적하고 씁쓸한 나날을 보내는 이들도 적지 않아서 '예전에는 유흥가의 여자 이제는 방탕한 사람의 아내'라고 노래하는 슬픈 시가도 남아 있다.
이후에도 예기의 역사는 계속되서 남북조 시대에도 많은 귀족들이 그녀들을 찾았따. 황실과 관계가 있는 귀인 유효작이 언젠가 예기와 하룻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에 슬그머니 일어나보니 건물 밖은 이미 출근길 관리들도 넘쳐나고 있었고 , 그 모습을 본 동료 하손이 유효작을 놀려댄 일도 있었다. 어쨌든 위와 같은 찬란한 생활은 서민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저렇게 일년 내내 여자와 놀 수 있는 사람들은 동서고금의 돈 많은 남자들 정도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