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안시대까지의 여러 불교 종파의 승려들은 이런 식으로 일단 여자를 멀리함으로써 형식적으로는 사음계를 지켜 왔다. 그러나 사음계에서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은 남색 행위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행했기 때문에 신자의 성애에 대해서는 관대할 수밖에 없었다. 즉 성애에 관해 선악을 가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는 모든 인간이 지니는 업으로서 이것을 자각하지 못하면 마음이 안정될 수 없으니 번뇌즉보리 색즉시공'이라는 식의 애매한 설교를 했던 것이다.
가마쿠라시대에는 히에이잔에서 수행을 마치고 하산한 승려 신란이 번뇌구족의 몸임을 자각하고 용감하게도 대처육식를 실천했다. 이에 비승 비속 무게의 중이 출현하게 되었고, 따라서 문도가 많았떤 정토진종에서는 승려와 신도 양측 모두 성애에 관해 죄악감이 전혀 없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다.
불교가 이런 식이니 일본 고유의 민족신앙인 신도는 이렇다 할 신의 가르침도 없이 성애에 관해서 너무도 노골적이다. 고지와 니혼쇼키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의 여러 신들의 원조에 해당하는 이자나기노미코토가 천신의 명을 받아 세상을 만들어내려고 했을 때ㅔ 여신인 이자니미노미코토를 향해 "그대의 몸은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묻는다.
여신이 "내 몸은 이제 다 만들어진 것 같은데,아직 덜 막힌 곳이 한 군데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러고 보니 내 몸에는 너무 튀어나온 부분이 한 군데 있으니 그대의 덜 막힌 곳에 내 것을 넣고 이 세상을 낳으면 어떨까?" 라고 하니 ,여신은 "그거 좋은 생각이군요"라고 답하고는 일본에서는 최초로 부부의 교합을 행해 많은 나라와 신을 만들어냈다고 되어 있다. 일본에서 지금도 음양석을 세워 놓고 참배를 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 기인한다.
이상과 같이 근대 이전의 에도시대까지의 일본인에 있어 신도나 불교는 외경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친근한 후원자와 같은 존재였다. 사랑을 이루기 위해 신불전에 백일기도를 한다든지, 기요미즈관음등을 매일 참배했던 것이다. 호색일대남 둘째 권에서 14세의 주인공 요노스케가 관음을 참배하면서 "이런 소원을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그녀는 언제쯤 나를 만나줄까요?"라고 기원하자, 그 말을 들은 하인이 "이번에도 한 번으로 끝내고 말 사랑을 기원하시는구나"라고 중얼대는 모습을 일상적이었다. 당시 일본의 수도인 에도의 아사쿠사에는 밀교사원ㅇ인 세이텐구가 있었는데, 그 본존은 남녀가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것이 부부 화합의 신으로서 인기가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인 것이다.
일본은 근세 이래 중국과 조선의 유교문화를 받아들였지만, 그것은 유교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문화를 수용한 것이었고 남녀 유별과 동성 결혼 불가, 일부종사 등의 성을 둘러싼 관습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일본인의 성의식은 2천년이 지난 현재에도 크게 변화했다고 보기 어렵다, 근대 이후 서양의 도덕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일본은 성의식 측면에 있어 늘 서양을 의식하고 서양의 기준에서 행동하려고 했던 근대 100년의 역사가 존재하지만, 그 바탕에는 2천년 이상 계속되어 온 일본인의 전통적 성의식이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점은 중세시대까지 한국인의 성의식과 여러 면에서 공유되는 면이 없지 않지만, 근세 이후의 유교의 수용과 그 전개 과정에서 많은 상이점을 보여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사진 통계와 함께 읽는 일본 일본인 일본문화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책) 35년 6권 1936-1940 결전의 날을 준비하라. (0) | 2023.07.24 |
---|---|
일본의 성문화- 남색 ,마쿠라에 춘화 그리고 유곽 (0) | 2023.07.21 |
일본의 성(性)문화-종교와 문학 속의 성의식 (1) (0) | 2023.07.19 |
일본의 성(性)문화- 한일 양국인의 성의식의 격차 (0) | 2023.07.18 |
일본의 성(性)문화- 1 (0) | 2023.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