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혼인 제도는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제이지만 축첩을 용인했다. 양반 사족은 본처가 살아 있는 동안에 양인 이하의 여성을 첩으로 맞이하는 일이 많았. 본처 외에 데리고 사는 여자를 흔히 첩.소실.측실.부실.후실 등으로 불렀다.
이러한 취첩 현상은 무엇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일까. 우선 조선시대 사람들은 남성이 첩을 얻는 것에 대해 매우 관대햇다. 이런 풍조는 중국 고전에서 영향받은 측면이 있다. 제후는 9명의 여성을 취할 수 있고, 경이나 대부는 1명의 처와 2명의 첩, 그리고 사는 1명의 처와 다른 1명의 첩을 취할 수 있었다. 조선의 신유학 신봉자들은 이러한 관념을 수용하여 생활에 내면화햇다. 이 영향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첩을 얻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취첩 해우이를 자신의 능력이나 남성다움을 보여 줄 수 있는 호기로운 행위로 여겼다.
양반 관직자의 경우 혼인 이후 부부의 동거율이 상대적으로 높지 않다는 사실도 문제엿다. 유희춘을 예로 들자면, 이 부부는 결혼 뒤 40년 이상을 해로했는데, 실제 함께 생활한 기간은 반도 미치지 못한다. 유희춘이 상경하여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부인 송덕봉은 향리에 남아 가사 전반을 관리 감독했다.
부인과 떨어져 사는 동안 남성에게는 개인적인 수발을 담당할 또 다른 여성이 필요했다. 그 경우 첩이나 관기와 함께 생활했으며, 혼자서 생활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570년 6월 한양에서 관직생활을 하던 유희춘이 편지를 보내 부인에게 몇 달간 혼자 생활한 것을 자랑하는 점으로 보아, 양반 남성이 혼자 생활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엇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양반 사족은 여성을 사횢거 여건에 따라 존비와 귀천으로 서열화했다. 즉 상층 여성의 성은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존중되어야 하는 반명, 하층 여성의 성은 보호할 가치가 없는 하찮은 것이라 여겼다. 양반 사족과 하층 여성의 결합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한편 하층 여성들 중에는 양반 사족의 첩으로 들어가 풍족한 생활을 기대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바람직하게 여겼던 혼인 형태는 중매를 통해 가문과 가문이 결합하는 것이었따. 그러나 축첩은 일반적으로 본처가 있는 상황에서 또 다른 여성을 들이는 비정상적인 형태이므로 첩을 들이는 방법이나 과정에서 본처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첩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었다. 즉 양반가에서 성장한 얼녀에서부터 관청에서 남성의 성적 수발을 담당하던 기녀까지 매우 다양했다. 서얼은 첩의 자식을 일컫는 용어인데, 그중 서자녀는 어미가 일반 양인이며 얼자녀는 어미가 천인인 경우를 말한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시대 양반 성(性)이야기-첩 들이기 (3) (0) | 2023.08.04 |
---|---|
조선시대 양반 성(性)이야기-첩 들이기 (2) (0) | 2023.08.03 |
조선시대 양반 성(性)이야기- 여비는 갓김치종 (2) (0) | 2023.08.02 |
조선시대 양반 성(性)이야기- 여비는 갓김치종 (1) (0) | 2023.08.01 |
조선시대 양반 성(性)이야기 -양반 남성의 기녀 (3) (0) | 2023.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