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첩을 들이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첩으로 들어오는 여인은 출신이 미천할 뿐 아니라 경제적인 능력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았따. 따라서 첩을 들이는 데는 상당한 비용이 들어갔다. 그나마 상대가 자기 여비인 경우에는 취첩 과정이 수월했지만, 그렇더라도 자녀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첩의 소생은 본처의 자식들과 주종 관계를 형성하며 평생 신분적 제약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타인의 여비를 첩으로 삼으 때는 그 과정이 복잡했다. 이때는 속신과 속량 절차가 모두 필요했다. 여비의 주인은 여비를 팔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팔더라도 많은 비용을 요구했다. 유희춘의 조카 오언상은 다른 사람의 여비인 말대를 겁간하여 첩으로 삼으려 했지만, 주인이 말대의 몸값으로 여비 4명을 요구하는 바람에 되물릴 수밖에 없었다.
오희문의 쇄미록에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등장한다. 오희문의 아들 오윤겸은 여러 차례에 걸쳐 취첩했다. 다른 사라므이 여종인 진옥관 관계하여 취첩하려 했짐나, 진옥의 주인이 취첩을 허락하지 않아 결국 포기해야 했다.
떠나가는진옥을 보면서 오희문은 "잉태한 자식이 만약에 죽지 않으면 어찌한단 말인가"라고 한탄하였다.
태어나 근심거리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른 뒤 오희문은 진옥에 대한 소식을 듣고 어린 손녀를 보고싶어 했다. 그러자 진옥이 어린 딸과 함께 술과 안주를 들고 오희문을 찾아왔다. 진옥은 딸아이의 이름과 출생일을 오희문에게 알려주며 하염없이 울었다.
아이가 걷고 말을 하는 것이 사랑스러웠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오희문은 진옥이 개가했는지 궁금했으나 차마 묻지 못했고, 간단한 예물을 주어 보냈다.
첩을 들일 때도 비용이 들지만 , 들이고 나서도 상당한 비용이 들어간다. 이제 첩은 성적 대상을 넘어 보살펴야 할 식솔이기 때문이다. 유희춘은 첩가의 생계 대책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필요한 물품을 보내주는가 하면 노비를 지급하기도 하고, 자신이 배정받은 반인을 첩가에서 사역하도록 했다. 첩 무자도 남편 유희춘의 영향력에 힘입어 상당한 부를 축적햇으며, 20여칸이 넘는 집을 짓기도 했다. 어우야담에서 강구수란 사람은
"나는 밥을 먹이지 않아도 되고 옷을 해주지 않아도 되는, 아름다운 첩을 얻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이는 첩을 얻는 것이 양반 사족에게 상당한 부담이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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